동물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앞과 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한다. 머리는 항상 한쪽 끝에 있고, 척추동물의 경우 척추뼈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며, 팔과 다리는 정해진 자리에서만 나온다. 그런데 수정란은 그저 둥근 세포 하나에서 시작한다. 이 균일해 보이는 세포 덩어리 안에서 어떻게 공간 좌표가 정해지고, 그 좌표에 맞춰 머리, 몸통, 사지 같은 구조가 차례로 배치될까? 이 질문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 집단이 바로 Hox 유전자이고, 그 유전자가 만들어 내는 패턴이 곧 형태형성(morphogenesis)의 언어다.
형태형성은 말 그대로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세포들이 어디로 이동하고, 어느 방향으로 늘어나고, 어느 지점에서 접히거나 구부러질지를 결정하는 일련의 규칙을 포함한다. 그러나 세포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여기가 머리 쪽인지, 꼬리 쪽인지", "몸통의 몇 번째 구간인지" 같은 좌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지도가 있어야만 건물을 설계할 수 있듯이, 세포에도 위치 정보가 필요하다. 이 위치 정보를 부여하는 전사인자 집합이 Hox 유전자다.

Hox 유전자는 DNA상에서 서로 나란히 배열된 유전자 클러스터 형태로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염색체 위에서의 순서와 몸에서 발현되는 위치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클러스터의 앞쪽 유전자는 머리 쪽, 뒤쪽 유전자는 꼬리 쪽에 더 가까운 영역에서 발현된다. 이를 공선성(colinearity)이라고 부른다. 마치 책장에 꽂힌 책 순서가 지도의 좌표처럼 해석되는 셈이다. 배아가 길쭉한 몸 축을 형성해 갈 때, Hox 유전자들은 구간마다 서로 다른 조합으로 켜지면서 "이 구역은 목", "이 구역은 가슴", "이 구역은 허리"와 같은 지역 정체성을 부여한다.
하나의 세포가 어떤 Hox 조합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구간의 뼈 모양, 근육 배열, 신경 분포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실험동물에서 특정 Hox 유전자를 제거하면, 가슴뼈가 허리뼈처럼 바뀌거나, 갈비뼈가 나올 자리에 갈비뼈가 사라지기도 한다. 반대로 머리 쪽에서 평소보다 더 뒤쪽 Hox 유전자가 켜지게 만들면, 머리뼈 일부가 몸통뼈와 비슷한 구조로 변하는 현상도 관찰된다. Hox 유전자가 단순히 '장식용 마커'가 아니라, 실제 구조를 규정하는 좌표 코드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곤충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작동한다. 초파리에서 처음 발견된 homeotic 변이체에서는, 더듬이가 위치해야 할 자리에서 다리가 자라난다. 이때 변이가 일어난 것이 바로 Hox 계열 유전자다. 머리 영역에서 원래 몸통을 지정하던 Hox 패턴이 잘못 켜지면서, 그 부위가 "여기는 몸통이다"라고 착각해 다리를 만든 것이다. 생물종이 달라도 Hox 유전자의 기본 구조와 기능은 놀라울 만큼 보존되어 있다. 물고기, 개구리, 쥐, 인간까지도 Hox 클러스터를 가지고 있고, 염기서열과 발현 패턴도 상당히 비슷하다. 이는 '몸의 앞뒤 좌표를 정하는 언어'가 진화 과정에서 얼마나 강하게 유지되어 왔는지를 보여 준다.
그렇다고 Hox 유전자가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Hox는 다른 신호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좌표를 정교하게 다듬는다. 대표적인 것이 레티노산, FGF, Wnt 같은 모르포겐(morphogen) 신호다. 이 신호들은 배아의 몸의 축을 따라 농도 기울기를 형성하며, 특정 농도 이상에서만 각 Hox 유전자를 켜거나 끈다. 동시에, 체절을 만드는 분절 시계(segmentation clock)와도 연결되어, 어느 시점에 어떤 체절이 만들어질지를 조율한다. 즉, 시간 축과 공간 축의 정보가 합쳐져 Hox 패턴을 결정하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형태형성이 진행되는 구조다.
형태형성 자체는 훨씬 더 물리적인 과정이다. 예를 들어 척추동물의 사지가 자라날 때, 처음에는 작은 돌기 형태의 사지싹이 생기고, 그 안에서 뼈와 근육, 힘줄이 구분된다. 이때 사지싹의 앞, 뒤, 위, 아래 축마다 서로 다른 Hox 조합이 겹겹이 발현되면서, 팔꿈치와 손목, 손가락이 형성될 위치가 정해진다. 그 정보를 받은 세포들은 특정 방향으로 분열을 더 많이 하거나, 일렬로 늘어서거나, 일부는 프로그램된 세포사멸을 통해 공간을 비워 손가락 사이를 만들어 낸다. 즉, Hox는 "여기서 이런 형태 변화를 일으켜라"라는 명령의 좌표를 찍어 주고, 실제 움직임은 세포와 조직이 수행하는 셈이다.
이 좌표 시스템의 중요성은, Hox 패턴에 작은 변화만 생겨도 몸의 설계도가 크게 바뀐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물고기의 지느러미에서 네발 동물의 사지가 나타날 때, Hox 발현 영역이 어떻게 확장되고 재구성되었는지에 주목한다. 사지 끝부분에서 관찰되는 Hox 조합이 기존 지느러미와 다르게 재배열되면서, 단순한 지느러미뼈 대신 여러 마디로 나뉜 손가락뼈 구조가 가능해졌다는 가설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좌표를 읽는 언어가 조금 달라지면서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다는 관점이다.
오늘날 의학과 재생생물학에서도 Hox와 형태형성의 언어는 여전히 중요하다. 척추 기형, 사지 기형, 일부 선천성 심장질환 등은 특정 Hox 유전자 또는 그 조절 네트워크의 이상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줄기세포를 이용해 인공 조직이나 장기를 만들려 할 때, 단순히 분화만 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포들이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관절이 될 곳인지'를 알 수 있도록 좌표 정보를 함께 제공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Hox 유전자는 발달 과정에서 몸의 좌표를 그리는 공간 언어이고, 형태형성은 그 언어를 해석해 실제 구조로 번역하는 행동 규칙이라 할 수 있다. 수정란 단계에서는 그저 평평한 종이 같던 세포 덩어리가, Hox라는 언어로 머리, 목, 가슴, 사지라는 구역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비로소 지도를 가지게 된다. 그 지도를 따라 세포들이 이동하고, 늘어나고, 접히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의 윤곽이 만들어진다. 한 줄의 DNA 코드에서 시작된 정보가 어떻게 3차원 형체로 엮이는지 궁금하다면, 결국 Hox 유전자와 형태형성이 서로 주고받는 신호와 규칙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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