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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후성유전과 발달, DNA 위에 씌워지는 운명 스위치

by songshine 2025. 11. 18.

세포 운명과 분화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파고들면, 금방 한계에 부딪힌다. 같은 유전체를 가진 세포들이 서로 다른 모습과 기능을 유지하려면, 특정 유전자는 오래도록 켜져 있어야 하고, 또 어떤 유전자는 평생 꺼진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DNA 염기서열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기억 장치'는 어디에 새겨져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개념이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유전자를 넘어선 수준의 조절'인데, 쉽게 말해 DNA 위에 덧입혀지는 스위치와 표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후성유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치는 DNA 메틸화다. DNA 염기 가운데 시토신 일부에는 메틸기라는 작은 화학 그룹이 붙을 수 있다. 염기서열은 그대로지만, 그 자리의 시토신 위에 '메틸'이라는 스티커가 붙는 셈이다. 이 메틸화 표지가 촘촘하게 달라붙어 있는 구간은 대개 전사가 억제되어, 그 유전자는 잘 읽히지 않는다. 반대로 메틸화가 거의 없는 구간은 전사인자가 접근하기 쉬워 활발히 발현된다. 한 번 메틸화 패턴이 만들어지면, 세포가 분열할 때 DNA 복제와 함께 비교적 충실하게 복사된다. 덕분에 세포는 어떤 유전자를 켜고, 끌지를 자손 세포에 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중요한 장치는 히스톤 변형이다. 진핵세포의 DNA는 히스톤이라는 단백질 덩어리에 둘둘 감겨 크로마틴이라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히스톤 꼬리 부분에 아세틸화, 메틸화, 인산화 같은 다양한 화학 그룹이 붙을 수 있는데, 어떤 조합이 붙어 있느냐에 따라 DNA가 느슨하게 풀릴지, 단단하게 감길지가 달라진다. 느슨하게 풀린 구간은 전사 기계가 접근하기 쉽고, 꽉 막힌 구간은 거의 읽히지 못한다. 히스톤 꼬리에 달린 이 표지 조합을 흔히 '히스톤 코드'라고 부르는데, 같은 염기서열이라도 어떤 코드가 올라가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발현 패턴이 나온다.

다음으로, 크로마틴의 3차원 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전체는 단순히 일직선으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핵 안에서 여러 고리와 루프를 형성하며 접혀 있다. 어떤 유전자 영역이 활성화되려면, 해당 구간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도메인에 위치해야 하고, 멀리 떨어져 있던 강화자 영역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맞닿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이런 입체적인 재배열 역시 후성유전 단백질과 복합체들에 의해 조절된다.
이러한 후성유전 스위치는 발달 과정에서 세포 운명을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배아 단계에서 특정 전사인자가 활성화되면, 그 전사인자는 자신이 켠 유전자를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주변 크로마틴을 느슨하게 만들고, 필요 없는 다른 계통의 유전자 주변에는 메틸화와 억제 표지를 촘촘히 깔아 둔다. 이렇게 한 번 장식된 후성유전 패턴은 세포분열을 거듭해도 상당 부분 유지된다. 결과적으로 "이 세포는 신경세포다", "이 세포는 간세포다"라는 정체성이 DNA 염기서열이 아니라 염기서열 위에 덧입혀진 표지의 패턴으로 장기간 보존된다.
후성유전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을 설명해 준다. 바로 게놈 각인과 X 염색체 불활성화다. 게놈 각인은 어머니에게서 온 대립유전자와 아버지에게서 온 대립유전자가 동일한 서열을 갖고 있어도, 어느 쪽이 발현될지 후성유전 표지로 구분해 놓는 현상이다. 특정 유전자는 아버지 쪽에서 온 것만, 또는 어머니 쪽에서 온 것만 켜지도록 메틸화 패턴이 다르게 새겨져 있다. X 염색체 불활성화는 여성 개체에서 두 장의 X 염색체 중 한 장을 거의 완전히 침묵시키는 과정이다. 초기 배아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한 X 염색체가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 크로마틴 응축을 통해 '조용한 상태'로 고정되고, 이 상태가 후대 세포에도 그대로 전달된다. 이런 사례들은 후성유전이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발달 프로그램 자체를 설계하는 중요한 언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후성유전은 민감한 시기이다. 특정 시기에는 환경 신호가 후성유전 패턴에 더 강하게 각인되고, 시기가 지나면 같은 자극을 받아도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양 상태, 스트레스 호르몬, 특정 호르몬 농도의 변화는 배아와 신생아 시기에 후성유전 표지에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고, 이러한 표지는 성장 후의 대사, 스트레스 반응, 면역 반응 패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물론 개별 사례마다 기전과 영향의 크기는 다르지만, 발달 초기에 환경과 후성유전이 강하게 상호작용을 한다는 큰 방향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성유전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마법의 단어'는 아니다. 후성유전 표지는 계속해서 쓰이고 지워지는 동적 시스템이다. 발달이 진행되면서 일부 표지는 자연스럽게 재설정되고, 성체에서도 세포가 받는 자극에 따라 부분적으로 조정된다. 암세포에서 관찰되는 비정상적인 메틸화 패턴이나 히스톤 코드의 붕괴는, 후성유전 조절이 깨졌을 때 조직 항상성이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반대로, 연구자들은 이 가소성을 이용해 역분화 세포를 만들거나, 잘못 각인된 후성유전 표지를 약물로 되돌리는 치료 전략을 탐구 중이다.
결국 후성유전과 발달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전체가 설계도라면, 후성유전은 그 설계도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읽을지를 정해 주는 사용 설명서라는 것이다. 동일한 DNA를 가진 세포들이 서로 다른 운명을 선택하고, 그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용 설명서가 세포마다 다른 방식으로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발달 과정에서 한 번 내려진 운명 결정이 어떻게 기억으로 남는지, 환경 경험이 어떤 경로를 통해 몸에 새겨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결국 후성유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운명 스위치를 해석하는 일은 발달생물학의 중요한 축일뿐 아니라, 질병의 기원과 재생의학, 심지어는 노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