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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세포 운명 결정과 분화, 같은 유전자가 다른 세포를 만드는 방법

by songshine 2025. 11. 17.

우리 몸을 겉에서 보면 피부, 근육, 장기들이 정교하게 조립된 하나의 구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모든 것은 세포라는 공통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뇌를 이루는 신경세포, 산소를 나르는 적혈구, 힘을 내는 근육세포, 해독과 대사를 담당하는 간세포는 모양도 기능도 완전히 다르지만, 놀랍게도 한 사람 안에 있는 이 세포들은 거의 같은 유전체를 공유한다. 똑같은 설계도를 가지고도 다양한 세포가 생겨나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포 운명 결정과 세포 분화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세포 운명 결정은 한 세포가 앞으로 어떤 종류의 세포가 될지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초기 배아의 세포들은 겉보기에는 크게 구분되지 않지만, 각 세포는 위치와 이웃, 주변에서 분비되는 신호에 따라 서로 다른 정보를 조금씩 받고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성장 인자나 모르포겐이 높은 농도로 퍼져 있는 영역에 놓인 세포는 그 신호를 감지해 특정 전사인자를 켜고, 다른 영역의 세포는 전혀 다른 전사인자를 활성화한다. 이렇게 활성화된 전사인자의 조합이 바로 '이 세포는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규정하는 첫 문장이 된다. 아직 눈으로 보기에는 구조 차이가 거의 없지만, 유전자 발현 패턴은 이미 서로 다른 길로 갈라지고 있는 셈이다.
운명이 한 번 방향을 잡으면, 그다음에는 분화 과정이 이어진다. 분화는 세포가 선택된 운명에 맞게 구조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바꾸어 가는 단계다. 신경세포로 분화하기로 결정된 세포를 예로 들면, 세포골격을 재배치해 긴 축삭과 수상돌기를 뻗을 수 있는 형태로 변하고, 전기적 신호를 만들기 위한 나트륨, 칼륨 이온 채널과 신경전달 물질 수용체를 대량 발현한다. 반대로 근육세포로 분화한 세포는 수축을 담당하는 액틴과 미오신 단백질을 촘촘히 쌓고, 칼슘을 저장 및 방출하는 소기관을 발달시킨다. 유전체 자체는 동일하지만, 어떤 유전자를 어느 정도 켜고 끌 것인지의 조합이 달라지면서 전혀 다른 세포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전체 과정은 복잡한 유전자 네트워크에 의해 조율된다. 많은 전사인자는 스스로의 발현을 강화하는 양성 피드백 고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자극으로 특정 전사인자가 조금 활성화되면, 그 전사인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발현시키고, 동시에 경쟁하는 다른 운명 프로그램을 억제한다. 이렇게 되면 세포는 애매한 중간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특정한 운명 쪽으로 더 깊이 미끄러져 내려가 안정된 상태에 도달한다. 마치 약간 기울어진 공이 언덕을 타고 내려가 어느 골짜기에 안착하듯, 세포도 하나의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면 그 상태를 쉽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포 운명 결정에서 시간과 공간은 모두 중요하다. 같은 신호라도 언제 받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노출되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발달 중인 신경관에서는 일정 시간 동안만 특정 모르포겐이 높은 농도로 유지되는데, 이 시기에 신호를 받은 세포만이 운동뉴런으로 분화하고, 그 이후에는 같은 위치에 있어도 다른 운명을 갖게 된다. 또, 세포가 조직 안에서 차지하는 정확한 좌표도 관건이다. 서로 다른 모르포겐 농도 기울기가 겹치는 지점에서만 특정 전사인자 조합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몇 세포 직경 정도의 위치 차이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줄기세포는 이 운명 결정 과정의 출발점이자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배아 줄기세포는 거의 모든 세포형으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상태로, 아직 특정 운명에 고정되지 않은 열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발달이 진행되면서 줄기세포는 점점 선택지를 줄여 가며 혈액, 신경, 근육 등 각 계통의 전구세포로, 다시 더 특화된 세포로 분화해 나간다. 성체의 장, 피부, 혈액 같은 조직에는 성체 줄기세포가 남아 있으며, 손상된 세포를 교체하고 조직의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때도 운명 결정 규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조혈모세포는 미세한 신호 차이와 전사인자 조합에 따라 적혈구 계열, 백혈구 계열, 혈소판 계열로 갈라진다.
세포 운명 프로그램이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이유는, 각 조직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기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세포는 해독과 대사를 담당해야 하고, 심장 근육세포는 일정한 리듬으로 수축 및 이완을 반복해야 하며, 신경세포는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이미 분화가 완료된 세포는 대부분의 경우 운명을 쉽게 바꾸지 못하도록 여러 겹의 잠금장치를 갖추고 있다. 필요하지 않은 유전자는 염색질이 단단히 감겨 접근이 어렵게 되어 있고, 후성유전적 표지가 붙어 지속적으로 꺼진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구조적, 화학적 장치가 합쳐져 하나의 세포형이 평생에 걸쳐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이 시스템이 항상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 결정과 분화를 제어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거나, 후성유전적 조절이 교란되면 세포는 더 이상 정상적인 신호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세포주기를 멈추지 못하고 무한 증식하거나, 원래 속하지 않던 조직으로 잘못 이동하기도 한다. 많은 암은 이런 운명 프로그램의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 반대로 연구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역분화된 iPS 세포를 만들기도 한다. 이미 분화가 끝난 피부세포에 특정 전사인자 조합을 강제로 도입해 다시 배아 줄기세포 비슷한 상태로 되돌린 뒤, 원하는 세포형으로 다시 분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세포 운명이 한 번 정해지면 절대 바뀌지 않는 운명이라기보다는, 안정된 상태지만 적절한 자극으로 다른 상태로 옮길 수 있는 동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결국 세포 운명 결정과 분화는, 하나의 유전체가 어떻게 수많은 서로 다른 세포형으로 구체화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언어다. 발달 초기에 내려진 작은 차이, 예를 들어 특정 신호를 조금 더 오래 받았는지, 특정 전사인자가 어느 시점에 켜졌는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뇌, 간, 근육처럼 전혀 다른 구조와 기능으로 확대된다. 하나의 수정란에서 출발한 삶이 이렇게 다양한 세포로 나뉘고, 다시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운명 결정 시스템이 놀라울 만큼 정밀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이해하는 일은 발달생물학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재생의학과 암 연구, 그리고 생명체가 어떻게 자신을 조직하고 유지하는지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단서를 제공한다.